책읽기/미디어자몽 칼럼

[드라마X책] 우리는 어디에 사는가-마블 데어데블 X 한국이 싫어서

보라돌이입니다 2016. 3. 2.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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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외계인의 침공을 당했다. 빈민가인 헬스 키친(hell`s kitchen)에는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이후 그 곳 헬스 키친을 재개발하기 위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변호사가 헬스 키친에 사무실을 개소했다. 마블과 넷플릭스의 드라마 마블 데어데블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참 변호사 포기 넬슨과 맷 머독은 헬스 키친 출신이다. 이들은 외계인이 뉴욕을 침공한 직후, 즉 영화 어밴저스가 끝난 바로 다음 시점에 헬스 키친에 사무실을 함께 차린다. 그 즈음 헬스 키친에는 대형 조직 범죄가 자주 일어난다. 이 모든 범죄의 뒤에는, ‘윌슨 피스크라는 남자가 있다. 그 역시 헬스 키친 출신이다. 그는 헬스 키친에서 마약과 인신 매매 등의 범죄를 일삼는다. 그리고 이 범죄들의 근원을 쫓는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가 암약하기 시작한다.

헬스 키친. 이 모든 등장인물들의 고향이다. 넬슨, 머독, 피스크 모두 자신들의 고향 헬스 키친을 사랑한다. 넬슨과 머독이 헬스 키친에 사무실을 연 것은 이 지역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변호해 주기 위해서였다. 윌슨 피스크 역시 사실 이 헬스 키친을 가난과 범죄가 넘치는 땅이 아닌 새로운 곳, 더 나은 곳으로 재개발할 돈을 모으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고향을 위해 두 변호사와 한 범죄 두목은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곧 한 건물의 철거 문제로 충돌하게 된다. 건물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쫓아낼 수 없다는 넬슨과 머독, 그리고 내보내기 위해 각종 악랄한 수를 내는 피스크, 그리고 피스크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검은 마스크의 남자. 점점 세상에 드러나는 피스크의 어두운 면, 피스크에 의해 목숨의 위기를 연이어 맞는 검은 마스크, 검은 마스크의 정체와 그에게 씌워지는 누명.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그들의 고향, 헬스 키친이 있다.

고향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과는 반대로,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는 제목 그대로 한국을 싫어한다. 그래서 한국을 떠난다. 잠깐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민을 가버린다. 그녀는 자신을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녀는 너무나도 까다로운 나머지, 다른 사람들 모두가 견디고 버티고 살아가는 이 한국을 견딜 수가 없다. 버티고 싶지 않다. 그녀는 그래서 한국을 떠났다.

그녀를 만류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 남자친구, 친구들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호주로 떠난다. 호주에서도 그녀는 많은 고생을 겪는다. 닭장 같은 쉐어하우스에서 살며 베드버그에 시달리기도 하고, 인도네시아 갑부 남자친구를 사귀며 요상한 기분을 느껴보기도 했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비에 허덕이는 날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그녀는 기자가 된 전 남자친구를 만났다. 기자가 되어 미친 듯이 일하며 사는 전 남자친구를 보며, 그녀는 절망한다. 한국에서의 생활에 환멸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 그녀는 다시 호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한국을 잊고 호주에서의 삶에서 행복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한국이 싫어서에서 나타나는 한국은 계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괜찮은 남자친구, 가족,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한국에서 행복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난, 너무 추운 날씨, 여성으로서의 성별 등으로 상징되는, 자신이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너무나 높은 장벽을 한국에서 마주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도 이러한 장벽을 견디거나 극복하게 도울 수 없다. 그래서 계나는 떠난다.

넬슨, 머독, 피스크에게 헬스 키친은 잊고 싶은 과거의 공간일 수도 있다. 그곳에는 고질적인 가난, 폭력, 마약이 난무한다. 넬슨은 동네 정육점 아들로 자라 딱히 내놓을 것 없는 출신이다. 머독과 피스크는 모두 헬스 키친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 곳을 떠난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온다. 왜일까? 그것은, 그들이 가진 장벽들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넬슨과 머독은 변호사가 되었다. 피스크는 폭력조직의 거물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가진 지위와 힘이 하나의 희망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꿈을 안고 돌아온다. 각자의 방법으로 고향에서 희망을 틔워 갈 수 있으리라고 그들은 꿈꾼다.

 떠나게 하는 것은 절망이다. 돌아오게 하는 것은 희망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공간을 돌이켜본다. 우리의 고향을 돌이켜본다. 우리의 삶의 공간에서, 우리는 희망을 느끼는가 아니면 절망을 느끼는가? 10, 20, 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통계는 이 물음의 대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새로워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을 만큼의 희망. 넘을 수 없는 장벽은 없다는 희망. 그 희망을 사회가 줄 수 있어야 한다. 넬슨과 머독이, 피스크가 가졌던 그 희망을 이제 계나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 고향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우리의 고향이, 우리의 삶의 공간들이 절망보다 큰 희망으로 다가오는 곳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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