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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X책] 젊음이란 무엇인가?-동주 X 수레바퀴 아래서

보라돌이입니다 2016. 3. 2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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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송몽규를 그리다. 영화 동주의 예고편 마지막에는 이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기고 그는 아주 젊은 나이에 절명했습니다. 영화적인 각색이 있었지만, 윤동주를 다룬 영화 동주는 참 감명깊었습니다. 영화 동주에는 윤동주 뿐 아니라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도 등장합니다. 만일 동주에 윤동주 혼자 등장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면, 이 영화는 식상한 위인전 영화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동주는 윤동주와 송몽규,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윤동주는 정지용 시인을 열렬히 흠모하는 문학소년입니다. 그는 기독교인 마을인 북간도 명동촌에서 여러 이웃, 친척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윤동주는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글이 좋았고, 좋은 글이 좋았고,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촌이자 친구인 송몽규는 이미 아주 어린 나이에 재능을 인정받은 천재였죠. 송몽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마을 어른들의 자랑이 되고, 윤동주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송몽규의 목표는 글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목표는 저 넓은 세상에 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조선 사람들에 있습니다.

 

그러나 두 젊은이의 앞길은 평탄하지 않습니다. 조선에서 조선말과 글을 없애려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동주는 시를 출판하기는커녕 자기가 쓴 시를 들켜서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합니다. 몽규는 일제의 강압적 통치 뿐 아니라 중국 군벌들, 그리고 조각조각 쪼개진 독립군과 임시정부에 환멸을 느낍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주의 작은 동네에 기벤라트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기벤라트씨 자신은 공부가 짧고 재능이 없었지만, 그의 아들 한스 기벤라트는 달랐습니다. 한스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영리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한스는 뭔가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스는 주에서도 엘리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신학교에 들어가라는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받습니다. 그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편두통이 만성이 되어서 늘 달고 살게 될 때까지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공부를 왜 하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한스는 자신이 왜 낚시를 즐거워하는지, 왜 토끼를 키우고 싶어하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인 수레바퀴 아래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한스는 또렷하게 알고 있습니다. 낚시, 토끼 기르기, 친구들, 좋아하는 여자아이. 그러나 한스의 공부가 계속되고, 신학교에 가게 되면서 그는 이 모든 것을 잊게 됩니다. 그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왜 좋아했는지. 대신 한스는 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그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 목사, 선생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속 머리가 아픕니다. 그래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유를 찾기보다 다른 사람에게서, 환경으로부터 계속 공부할 이유를 찾습니다.



 

동주는 시가 쓰고 싶고, 몽규는 모든 조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한스는 그저 낚시가 하고 싶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세상은, 주변 사람들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들을 막아섭니다. 동주와 몽규가 연희전문으로 진학하는 것도, 한스가 신학교로 진학하는 것도 사실은 주위 환경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들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돕지 않습니다. 막아섭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반응이지요.

 

동주는 시를 계속 씁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척박한 상황 속에서도 시만 쓰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시를 너무나 사랑하니까요.

몽규는 혁명 전선에 뛰어듭니다. 누군가의 혁명에 동참하다가 실패를 맛봅니다. 그 스스로 혁명을 조직하다가 역시 실패합니다. 한스럽고 분합니다. 연약한 자신의 젊음이 슬픕니다.

한스는 신학교에서 나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그는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행복했던 어린 시절, 소년기의 실패, 청년이 된 현재, 세 가지 모두를 절망합니다. 그는 죽습니다. 자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부끄러움과 분노와 절망. 우리의 젊음이 모두 가지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젊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꿈이 있었고, 그 꿈을 꾸며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꿈꾸게 두지 않습니다. 자꾸 어딘가로 내몹니다. 내몰린 그 곳에서, 우리는 부끄럽고 분노하고 절망합니다. 시대를 앞서간 많은 이들도 그랬습니다. 우리의 젊음이 부끄럽다고 해서, 분노와 절망 속에 산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윤동주와, 송몽규와, 한스 기벤라트의 이름을 빌린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젊음이 마냥 기쁘지 않은 것, 마냥 행복하지 않은 것이 정상입니다. 젊음은, 꿈꾼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우리 시대의 모든 젊음을, 앞서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던 젊음들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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