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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꼰대 멈춰! – 복음과상황 11월호

보라돌이입니다 2021. 11. 21.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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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월간지인 복음과 상황을 구독하고 있지만, 책을 쌓아둘 뿐 읽지 못하고 넘기는 달도 많다. 그러나 이번 달 표지에 쓰여 있는 문구는 손이 가지 않을 수 없는 문구였다. ‘꼰대와 나’. 나는 내가 꼰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꼰대들로부터 피해를 입은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꼰대가 되기를 두려워하고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마 많은 20, 30대 학생과 직장인들이 꼰대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강력한 커버 문구 덕분에 나는 11월호 복음과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어디에나 꼰대는 있다

 

책의 커버스토리에는 직장에도, 교회에도 존재하는 꼰대들을 소개한다.

꼰대가 되는 건 자연의 섭리일 수도 있겠지만에서는 회사와 교회에서 만난 꼰대들의 모습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들은 다 너 잘 되라고한마디씩 거들지만, 필요치 않는 조언을 일삼기 때문에 유해한 존재들이다. ‘우리 교회는 꼰대일까?’ 에서는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 교회가 등장한다면 꼰대가 되었으리라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꼰대가 된다에서는 교회 직원인 필자의 교회에서의 경험을 소개하며 꼰대로 인해 또다른 꼰대가 되는 교회 구성원들의 현실을 익살스럽게 소개한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커버스토리는 꼰대를 교육과 도덕의 관점에서 풀어낸 두 글이다.

 

꼰대와 안 꼰대 사이는 꼰대와 꼰대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을 교육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이 글에서 설명하는 꼰대의 특징은

1. ‘네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태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2. ‘네가 아는 것은 당연히 나도 알고, 네가 모르는 것도 나는 안다고 생각한다

3. ‘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 내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는 것이다. 상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고, 상대가 실제로 무엇이 필요한지도 관심이 없다. 오직 일방적인 주입만 있을 뿐이다. 교육의 관점에서 이는 은행저금식 교육을 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억압이다.

은행저금식 교육과 반대편에는 문제제기식 교육이 있다. 은행저금식 교육이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주입하는 교육방법이라면, 문제제기식 교육은 현실의 문제를 교육자와 피교육자 서로가 존재 대 존재로서 대화하며 알아내고, 서로의 존재가 필요한 지식과 문제해결 방법을 함께 찾아 나간다. 억압적이지 않고,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꼰대들이 승리하는 공동체를 넘어서라는 글에서, 교회 안의 꼰대는 자신이 선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꼰대는 자기 생각을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이 상식이 곧 도덕이며 믿음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강한 힘이 부여됨과 동시에 도덕적 순결과 모든 것을 아는(또는 안다고 우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절대적 힘과 도덕과 지적 능력,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같다. 교회 안의 꼰대는 자기가 하나님의 도움과 비호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 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같은 교회 안의 모습이 초대교회의 가르침과 반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사도 바울도 로마시대의 인물로서 가부장제와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대의 영향이 없지 않았으나, 스스로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또 유대인임에도 고난받는 이방인 교회 공동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했다. 그들에게 유대인의 기준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방인들과 함께하려 노력했다. 이를테면 꼰대의 시대에 가장 반-꼰대인 인물인 것이다.

 

나부터 실천하는 ‘꼰대 되지 않기’

 

꼰대는 매우 유해하다. 꼰대는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으며, 상대의 관심도 나에게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렇기에 꼰대를 상대하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나에게 관심 없는 그에게 관심을 끄거나, 나에게 헛소리를 해대는 꼰대를 비판하거나, 꼰대가 가진 달콤한 기득권 맛을 조금이라도 보기 위해 꼰대가 갈구하는 그 것, 관심을 준다. 꼰대에게 관심을 끄면 관계는 끊어진다. 비판을 하면 백이면 백 싸움이 난다. 꼰대에게 관심을 주면 그는 곧 꼰대가 되어 자기가 만나는 상대방에게 다시 관심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로운 꼰대를 없애 버릴 수 없을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수천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도 요즘 젊은 것들은 예의가 없다는 말이 쓰여 있다고 한다. 지금의 나이 많은 기득권층이 젊은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싸잡아 ‘MZ 세대라고 부르며 다 알고 있는 체 하듯이, 메소포타미아의 늙어가던 인류의 조상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젊은 이들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나 외의 다른 꼰대를 없앨 수 없으니, 나만이라도 꼰대가 되지 않아야 한다. 상대를, 특히 나보다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믿어 주고 힘을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이 없이는 나도 꼰대가 되어 버릴 수 있다.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주는, 나쁜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꼰대를 싫어하고 꼰대 되기를 경계하긴 하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싫은 존재인지, 우리가 왜 그들을 그렇게나 기분 나쁜 존재로 인식하는지 차분차분 알게 해 준, 그리고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더더욱 나 자신을 경계하게 해 준 11월의 복음과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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